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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칠의사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171-1
구례석주관성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구례석주관성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오랜만에 혼자 떠난 여행 때문에, 욕심을 많이 냈습니다.지리산을 일주하는 것은 또 늦은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무리였습니다그렇다면..다음 계획은 구례의 어디 근처에서 섬진강을 건너 섬진강을 끼고 내리막 하동에.그리고 진주에 대한 행로를 그리고 보았습니다.이번 여행에서 충분히 긴 돌았고 많이 봤는데.. 그래도 그 길 위에 있어서 이제 하나 본다.결심했습니다.밝은 해가 기니까, 아직 어딘가를 들여다볼 여력이 있으니까요.그 시간을 최대한 써야 합니다.막 피어 골에서 가깝고, 가행로의 중간에 있어 후반에 접어든 여정입니다만, 보려고 염두에 둔 점이 있었습니다.구례 석주 관성과 일곱의 절 무덤입니다.우선, 석주 관성에서 이해하고 가야 겠네요.석주 세키는 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지리산 한 시루 봉에서 뻗은 산맥이 급경사를 이루고 섬진강과 만나는 산 비탈.. 그 아래 좁은 길을 막고 통제하는 요새입니다.경상도 하동에서 섬진 강변을 따라서 지리산을 끼고 전라도 남원으로 통하는 좁은 길과 수로를 통제하는 천혜의 요새로서. 영남과 호남의 경계인 호남의 주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중요한 요새입니다.세키다면. 관문을 뜻하는 것으로 나라의 국경 요새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는 관문으로 그 관문 주변 성곽이며 기본적으로 험한 산세와 깊은 큰 강 사이의 좁은 길, 그리고 도로가 통과하는 지점을 막고 적을 감시 및 통제하는 요새의 일입니다.대표적인 것이 영남 오지의 문경 새재 새재 관문 3곳, 밀양 세 수 진 검 세 마을의 작품원관을 생각하면 됩니다.구례석주관성과 칠의사묘에서.. 1597년 동아시아 7년 전쟁의 불길이 다시 크게 타오르던 그때.. 가장 참혹했던 정유재란의 전란 속 지리산 자락 전라도 구례 이야기 속으로 시계 바늘을 뒤로 돌려봅시다.1592년 4월 맹하에 20만 일본군의 대대적인 조선 침공으로 동아시아 7년 전쟁이 개전된 이래 전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 잠시 주춤하던 사이 조선을 제쳐두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된 일방적이고 기만적이었던 강화는 결국 무너지고…일본은 대군을 몰아 대대적인 재침공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재침공에 앞서 1597년 7월 16일..거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매복과 기습에 휘말려 전멸했고, 일본군은 그 기세를 타고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넘어 북상해.. 조선은 다시 위기에 몰리고 있었습니다.1597년 8월 3일 아침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래 가옥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복직을 전하는 교서를 받습니다.최악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다시 두 어깨에 짊어지게 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복직한 직후.. 9명의 군관과 6명의 군졸을 이끌고 곧바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게 됩니다.이 시기에 구례석주관성이 역사에 등장합니다.8월 3일 첫날 밤 하동 행보 역(하동 요코가와 여의사토)에서 섬진 강변의 두치(하동읍 두곡), 쌍계동(하동 화개면)을 빗속을 뚫고 강을 건너고 달리면 그 밤에 구례의 석주관 성 외곽에 이르렀습니다.그리고 돌 기둥관 성 외곽에서 매복 중이던 구례 현감의 이 모토하루 장군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행을 맞아 적에게 맞설 전략을 숙의했습니다.이때 구례 현감의 이 모토하루(이·우오은츄은)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에게 일본군이 눈앞까지 다가와서 바로 밀고 들어와서 급히 움직이면 알겠습니다.구례 현감의 이·우오은츄은 장군은 가파른 돌 기둥 관성 주변 지형에 의지하고 매복하고 적과 맞서겠다고 밝혔으나 소수 병력으로 수천개를 넘는 일본군과 대항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군량과 물자를 없앤 뒤, 석주 관성을 포기하고 퇴각하다. 8월 6일경..구례는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이때, 구례의 백성이 일본군의 가혹한 살육과 방화, 약탈에 시달리다.구례는 초토화합니다.구례현감 이원춘 장군(파란색 갑옷을 입고 기마 중 활을 쏘는 장수)석주관성을 포기하고 물러난 구례현감 이원춘 장군은 전라도 병마사 이복남 장군 등과 합류하여 남원성으로 향하였고 남원성에서 4천 조명 연합군이 일본의 5만이 넘는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남원성이 함락되는 그날인 1597년 8월 16일 남원 성북문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사하였습니다.1598년 8월 3일 석주관성에서 전술을 협의한 후, 이날 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구례읍 성북문 쪽으로 이동하여 전군자감원 손인필 장군의 집에 머물며, 손인필 장군 부자가 합류하여.. 곡성, 광양, 순천, 보성, 장흥, 해남에서 진도까지.. 명량해전으로 이어지는 조선수군 대장정에 오릅니다.정유재란 때 남원 성이 무너지고 이어 전주 성이 무너졌습니다만..그 해 9월, 지산의 싸움에서 명나라군에, 아키라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방해되자 일본군은 조선의 서남해에 가 왜성을 쌓아 장기전으로 가려고 했어요.일본군의 남하의 길로 들어가는 마을은 예외 없이 초토화하고 살해당한 시신이 쌓이면서 피가 내를 이루고 나왔습니다.구례는 그렇게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합니다.1597년 9월, 구례 땅의 선비·왕 이익 인(1556~1597)이 50여명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그들은 석주관 성에 들어오고 여기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혔는데..결국 순천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장군 코니시 행영군 2천명이 돌 기둥 관성을 공격하고 구례 의병들은 처절하게 맞서서 싸웠습니다.그러나 중과 부적.결국, 석주관 성에서 구례 의병은 모두 순절하고, 시신 수습조차 못한 것입니다.그 해 11월, 구례의 젊은 선비들… 그렇긴..이·존 라이크 한·허 송 양·은 로크, 고·종철 오·정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의병이 다시 일어서다, 석주관 성에 모였습니다.그리고 이에 앞서서 돌 기둥관 성에서 순절한 임금 이득 의리 병장의 아들 왕 요시나리 선생님이 다시 장정을 모아 의병대에 합류했습니다.이렇게 수백명의 의병들이 모였습니다.구례 의병은 남원의 조·교은남 의병장 부대와 연합해서 렝다니에서 일본군을 습격하고 60여명을 참살하고 200여명의 포로가 됐던 조선의 백성을 구출하며 맹활약했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거의 1만개에 달하는 일본군의 보복 공세에 직면했습니다.일본군의 대공세를 맞아 구례 의병들은 인근 화엄사에 도움을 청했고, 이 도움 요청에 화엄사에서 의승병 153명이 의병대에 합류하여 일본군에 대항했습니다.11월 말, 수백명의 구례 의병과 의사 승병은 석주 관성의 험한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며 압도적인 군세의 일본군에 대항했습니다.석주 관성을 중심으로 가장 높은 곳은 왕 의성 부대, 아래쪽에 5의사와 요시카츠병 부대가 포진하고 활 쏘고 돌을 굴려서 죽기로 싸우고, 선전했습니다. 중과부적이고, 무기도 떨어지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결국 의병 부대는 왕 의성 부대의 일부를 남기고 모두 순절했습니다.석주관 성 주변의 계곡과 계곡을 의병과 의사 승병의 시체로 뒤덮고 그들의 피에서 내가 붉게 물들었습니다.그래서 석주 관성의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물을 “비~”.한자로 피 강과 부른다면서요.의병과 의사 승병의 충절, 정기. 눈물겨운 희생, 그리고 침략하고 온 일본군의 잔학함을 상기하다. 왠지 진주성의 말과 겹쳐서 보였습니다.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 여기서 가까운 지리산 화엄사와 렝다니사가 요시카츠병의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의 보복 때문에 전화를 받아 전소했습니다.후일담에 말해라고..석주관 성에서 순절한 일곱의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왕 의성 선생님이었습니다.석주관 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젊은 날 왕이 성 선생님은 뒤 병자 전쟁 때 노인으로 국난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고 화엄사의 벽암 스님과 함께 의병과 의사 승병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습니다.그러나 남한산성 근처에 이르고 결국 조선의 항복으로 화의가 성립하면 결국 눈물을 흘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은거했다고 합니다.석주관성에서 순절한 칠의사를 기리는 칠의사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습니다. 꽤 높은 축대 위에 칠의사로 가는 외삼문이 섰는데.. 장사문입니다.장사문을 지나면 좌우 대칭 구조로 숭의각과 제명각이 위치합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다시 축대를 오르는 내삼문이 보입니다.내삼문의 이름은 숙첨문이고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칠의사가 나옵니다.내삼문의 숙첨 문을 지나 나나 의사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여기는 동 아시아 나나년 전쟁의 막판 정유년 1597년에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에 대항하고 구례 석주관 성을 지키고 순절한 구례의 일곱 선비, 의사들을 모시면서 그 이름을 칠 의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칠 의사가 배열된 칠 의사는..원·드 퀸, 원·위 손 이·존 라이크 한·허 송 양·은 로크, 고·종철 오·존 선생님입니다.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당시 구례 현감으로 돌 기둥관 성에서 싸우고 후에 남원 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 모토하루 장군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일곱 뜻이지 밖의 뜰에서..고개를 숙이고 일곱 의), 이 모토하루 장군과 함께 의병과 의사 승병까지 찬양하고 예의를 말했습니다.칠의사에서 내려 아래 제명각 뒷다리 쪽 문으로 나오면 석주관성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이왕 온 김에 오랜만에 석주관성도 보고 갈 생각으로 걸었어요.곧 석주관성 성벽을 마주했습니다.지리산 왕실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섬진강과 만나는 급경사 사면 위에 쌓은 성벽입니다.사실 성이라기보다는 돌담과 같습니다.성벽의 높이가 1.2~1.3m정도 폭도 1m안팎입니다.물론 경사의 지형에 적이 몸을 지탱하고 싶지 않고 공성 무기의 동원도 어렵고 축성도 어렵기 때문 성벽을 높이 쌓기도 어렵고 그 필요도 없었다고 추측합니다.어떻게 싸웠을까.상상했어요.이 정도의 높이와 두께의 성벽은 사실상 돌담, 방벽인 성벽을 오르는 데에서 보고 성벽을 오르며 적을 막는 일반적인 미즈키 전과는 싸움의 양상이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의병과 의사 승병은 이 돌담의 같은 성벽을 엄 폐물로 해서 적에게 화살을 날렸고 성벽을 넘고 넘으려는 적군을 창 칼로 찌르거나 밀어낼 정도. 그 이상은 힘들겠죠.험한 지형이 있다고 할까..이런 상황과 조건 하에서는 도저히 수십배의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가능한 싸움은 불가능하다고 보였습니다.석주관 성에서 2차례의 전투가 의병과 의사 승병에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처절했을까.. 그려졌습니다.이 성벽이 수십 배에 이르는 정예병인 적군을 상대로 싸우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계속 그렇게 생각합니다.어쩌면 석주관성 의병과 의승병들은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뻔한 패배와 죽음을 알면서도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던 그런 싸움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석주관성을 내려 칠의사와 석주관성 성벽이 있는 반대편 언덕에 있는 칠의사묘로 갔습니다.그 아래 입구에 칠의사 사적비가 서 있었습니다.사적비를 지나 그 뒤에 있는 돌계단을 따라 20m 정도 걸어 언덕을 오르면 맞은편에 칠의사가 보이고..뒤쪽으로 ‘ㄷ’자 모양의 돌담을 둘러 정면으로 가지가 구불구불 멋진 배롱나무를 마치 일산처럼 드리운 그 아래 나란히 일렬로 늘어선 여덟 기의 작은 무덤을 보았습니다.구례석주관 칠의사묘입니다.일곱 무덤인데.. 왜 무덤이 8기인가? 물으니 칠의사에 구례현감 이원춘 장군을 함께 모셨으니.. 이건 맞은편 사당, 칠의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이 무덤에 모신 분들은..왼쪽에서 구례 현감의 이·우오은츄은 장군, 일곱의 절의 원·드 퀸, 이·존 라이크 한·허 송 양·은 로크, 고·종철 오 존, 마지막에는 한·위 손 선생님의 순입니다.그 잔혹하고 처절한 전쟁터가 결국 이분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부득이 초혼 묘로 조성되었습니다.석주관에서 생사를 같이 한전우인 뜻을 함께 한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에 서로 외롭지 않을 것이다.쳇 산도 함께 받고, 무덤 앞에 있는 향불도 함께 흠향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나나의 절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어요.칠의사묘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뒤돌아보면 칠의사묘를 바라보는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그 배롱나무가 충절의 상징처럼 붉게 꽃을 피울 때.. 다시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이 지리산 깊은 계곡, 시골에 묻혀 살아도 이곳에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어떻게 의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죠? 그들이 피흘려 싸워 지켜낸 산하는 늘 푸르고, 그들의 피흘린 피냄새는 마르지 않고 끝없이 흘러 섬진강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붉은 단심은 그들이 안식하는 무덤 앞 붉은 배롱나무에 피어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